그런날
2019. 6. 6. 01:19ㆍ소소한일상
하루는 너무 우울한 날이었다.
혼자있고 싶고 간섭받기도 싫고 아무도 보고싶지 않지만, 누군가는 날 신경써줬으면 하는 이상한 모순된 감정이 드는 그런날.
내나이 34살.
행운인지 불행인지 드라마도 잘 안보던 내가 나도 모르게 흘러흘러 드라마 제작자로 방송바닥에 발을 들이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 1년 4계절을 시골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 나니 남들 10년 촬영해도 안 겪을 별의 별 일을 짧은 시간에 짧고 굵게 다 겪으며 무식하게 직접 몸소 현장공부 제대로 잘 하면서 1년 프로그램을 하나 마무리 짓는다.
프로그램을 하나 마치면서 회사도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프로그램도 끝나고 회사도 끝나고 갑자기 많아진 시간.
그래도 방송에 발은 들였는데 드라마 한번 안보고 살던게 맘에 걸려 몇날며칠 작정하고 한번 봐야지 하고, 오늘은 기분도 우울하니 와인을 한잔 따르고 드라마를 닥치는데로 정주행하는 중이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드라마 대사들은 어쩜 다 내 마음을 이렇게도 잘 아는지 모르겠다.
그냥 계속 보다보면 머릿속에서 지워질 것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데, 그냥 오늘의 나 같은데, 기억해두고 싶은데,
드라마 작가들은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맛깔나게 후벼파는 것일까.
일시정지 재생을 무한반복 하며 알딸딸한 와인 취끼에 적어놓은 노트다.
너 알지.. 나 어렸을 때 까만옷은 쳐다도 안봤던거..
알지.. 빨강에 핑크에 노랑에.. 우리 만날때마다 수지랑 너 오늘은 무슨 옷 입고오나 내기하고..
근데.. 이제 옷장 열면 나도 모르게 안튀는 색 옷만 집게 된다. 어느 옷에나 입어도 잘 어울리고 어딜가도 튈 일이 없잖아. 그래서 좋아. 있지... 우리엄마 목욕탕 다니는 모임중에 아줌마 하나가 어느 보험회사 팀장인가 그렇데... 관리를 엄청 해서 날씬하고 주름도 없구 돈도 엄청 잘번데나봐. 목욕하고 나오면 맨날 밥도 사주고 아줌마들도 멋있게 산다구 엄청 부러워하고
응...
근데... 어디 놀러갈 땐 그 아줌마만 쏙 빼놓고 간다.
??
그 아줌마가... 빨간코트거든.... 일하느라 바빠서 결혼을 안했다.. 지호 난... 그냥 남들처럼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싶어. 남편도 있구, 애도 있는, 그런 아줌마. 친구들 모임가서 같이 시부모 얘기도 하고, 애키우는 얘기도 하고 그런 까만 코트만 입고 싶어 이제... 남들이랑 섞여있어도 튀지 않구 똑같은 사람... 남들하는거 똑같이 하면서 같이 얘기하구 같이 웃는거. 그게 내 꿈이야.
결혼은 나한테 너도 남들만큼 괜찮다. 여자로써 가치가 있다 라고 얘기해주는 까만코트야
호랑은 빨간코트가 참 잘어울리는 애였다. 남들과 다른색을 입어두 언제나 당당했던 아이. 그게 호랑이었는데..
우리는 언제부터 남들과 다른색이 부끄러워 지기 시작한걸까
하지만 무엇보다 씁슬한건 나 역시 결혼이란 까만코트를 입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거. 아니 좀 더 소직히 말하자면 좋았다. 무언가에 속한사람이 되었다는게.
결혼이란거 그런거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다 가진다는걸 제도적으로 공식화 해놓는거. 그래서 마음이 변하더라도 떠나기 어렵게 묶어두는거
- 드라마 <이번생은 처음이라> 中
오늘은 내가 외로운 날인가보다. 그래서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날인가보다.
728x90
320x100
'소소한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 드림씨어터 (0) | 2020.02.03 |
---|---|
행복하게 산다는건 무엇일까? (0) | 2019.08.23 |
짧은 일기 (0) | 2019.06.13 |
행복한 인생을 위한 재정비 (0) | 2019.06.05 |
두근두근, 첫 포스팅 (0) | 2019.05.19 |